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기원 ==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의 대립의 기원은 바로 일본 특유의 변하지 않은 오래된 사회구조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장비나 이론, 체제 같은 문물들만 현대화가 되었을 뿐, 본질적인 이념과 사회구조는 일본 열도 40몇여개의 섬에 나눠져 그들끼리 경쟁하는 구조로, 그 내부에서는 철저한 봉건사회적 계급주의 질서가 자리잡혀 있어 개개인의 능력보다 그 사람의 소속 가문이나 집단 등을 중요시하던 고대 시절의 사회구조에서 전혀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출신'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후쿠오카 현의 영주 노릇을 하는 [[아소 다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게 일본의 현재 상황인데, 하물며 이제 겨우 물건과 제도만 막 근대화가 되었을 뿐인 전근대 시절의 일본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구조는 일본이 본토 바깥에서 전쟁했던 모든 전쟁에 적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 그런데, [[임진왜란#s-4.2|당시 왜군의 편제]]는 지역별로 나눈 장수들의 개인병력이 연합한 형식으로 운영했다. 이런 편제는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순간적인 문제가 생겨서 병력을 분할해야 할때, 일원화된 지휘체계를 가진 군대라면 병력을 정확하게 숫자로 나누어서 지휘관을 붙인 다음 병력을 분할하면 되지만, 당시 왜군은 지휘체계도 일원화되어있지 않고 각자 속한 가문과 번, 파벌이 다르기 때문에 지휘관이 직접 모든 병력을 끌고가지 않는한 병력 분할이 안된다. 요약하면 중심이 없는 것. 이런 비효율적인 구성 때문에 연합작전에 차질이 생겼고, 심지어 군단이 다르면 아예 서로를 원수로 알고 무시하기도 했다.[* [[가토 기요마사]] 군이 한양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먼저 점령했다고 자존심을 구겼다며 고니시 군과의 합류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북쪽으로 진격한 사례가 대표적.] 즉, 이들은 전쟁중에도 자기 가문과 번, 파벌을 우선시해 협동작전이 전혀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중요한 전투에 이런 혼선으로 패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일본 육군]]의 기원은 [[조슈 번]][* 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의 [[타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奇兵隊)[* 말타는 기병(騎兵)이 아니고 특수부대라는 뜻임]이며, [[일본 해군]]의 기원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수군과 [[규슈]](특히 [[사쓰마 번]])[* 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 소속의 수군이었다.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게 꼭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국도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르다. 영국 해군은 로열 네이비라는 이름답게 국왕이 창설 주체이지만, 영국 육군은 내전 끝에 왕의 목을 자르고 공화제를 건설했던 [[올리버 크롬웰]]의 신형군을 뿌리로 뒀기 때문. 한술 더 떠 영국 육군의 상징인 레드 코트 역시 크롬웰의 군대가 기원이다!] 유독 일본에서 이 경우가 부각되는 이유는 '''양군의 주축인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오래전부터 심각한 수준의 철천지 원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수군)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은근히 이전에도 존재해온 전통이었다. [[헤이안 시대]]에도 [[미나모토|겐지]]와 [[타이라 가문|헤이지]]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세력을 쌓으며 대립했는데 지금의 [[간토]]지방이 세력권인 겐지는 육군이, [[규슈]]·[[시코쿠]]가 세력권인 헤이지는 수군이 강했다. 이는 간토와 [[간사이]]의 지역적 배경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간토는 변방, 특히 동북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넒혀 왔기에 육군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간사이는 규슈·시고쿠의 소규모 해적들을 비롯해 중국 본토, 류큐, 동남아시아, 한반도와 지속적으로 해로를 통해 교류를 해왔기에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때 [[삿초 동맹]]을 이뤄 막부를 타도하긴 했지만 원래 조슈 번은 [[존황양이]]와 토막(討幕)을 기치로 내세웠으나, 사쓰마 번은 공무합체(公武合體)와 토막이 혼재하여 [[다이묘]] 섭정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테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을 일으켜 토막파 번사들을 탄압하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양번(兩藩)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계기는 [[오미야 사건|쿠게(公家) 아네가코지 긴토모(姉小路公知) 암살 사건]]이었다. 긴토모가 암살된 자리에서 사쓰마 번사이자 막말 4대 [[히토키리|인참]][* 人斬り. 말 그대로 '사람 베기'. 주로 토막파 암살자들을 말한다.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히무라 켄신이 막말에 했다는 '히토키리'가 바로 이거다. 가상인물인 히무라 켄신과 달리 실존했던 4대 인참이 본문의 다나카 신베에 외에, [[오카다 이조]], [[나카무라 한지로]], [[카와가미 겐사이]]가 있다.]인 [[다나카 신베에]](田中 新兵衛)의 검이 발견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신베에를 조사하였으나 신베에는 검을 빼앗은 후 그대로 할복자결한다. 진범을 잡기가 애매해진 조정에서는 사쓰마의 [[교토고쇼]] 수비자격을 박탈했고, 사쓰마는 이를 조슈의 계략이라고 여겨 그대로 [[아이즈 번]][* 會津藩, 지금의 [[후쿠시마현]] 서부다.] 및 쿠와나 번[* 桑名藩, 지금의 [[미에현]] 일대다.]과 손을 잡아 오히려 조슈 번을 황거에서 몰아낸다. [[메이지 덴노]]의 선대인 [[고메이 덴노]](孝明天皇)는 조정의 존왕양이 쿠게들을 몰아내기 위해 8월 18일 정변(八月十八日の政變)을 일으킨다. 고메이 덴노는 양이론자였지만 또한 좌막론자에 가까웠다. 애당초 아이즈 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교토로 불러들인 게 이 인물이다. 삽시간에 교토에서 밀려난 조슈 번은 [[금문의 변]]을 일으켜 고메이 덴노를 납치하려 했으나 오히려 사쓰마·아이즈·쿠와나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다. 이때 사쓰마의 선봉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이후 제1차 조슈 정벌 때도 사쓰마는 선봉에 서서 조슈를 공격하였다. 그러다 [[토사]] 번(土佐藩)의 탈번 [[로닌]]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에 나서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막부토벌의 대호령' 등을 거치면서 사쓰마는 재빨리 토막으로 전향하여 [[에도 막부]] 타도에 성공한다. 그러나 료마가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으로 암살되면서 조슈와 사쓰마 사이는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예 이 암살사건이 어떤 배후세력이 '''이 둘을 다시 갈라두기 위해 벌인 [[이간질]]'''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메이지 덴노]]의 치세 중 흔히 정한논쟁이라 불리는 메이지 6년의 정변(明治六年政變)도 조슈와 사쓰마의 권력다툼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에토 신페이]](江藤 新平)·[[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 種臣) 등 정한파들이 패배하면서 권력은 급속도로 조슈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한파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가의 난]]·신푸렌의 난·[[세이난 전쟁]] 등을 차례대로 일으키나 모두 진압당하고 만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조슈 출신 인사들은 육군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사쓰마 출신들은 큰 타격을 입긴 했으나 아주 박멸된 것은 아니라서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중심으로 해군을 장악한다. 이랬으니 육군과 해군이 따로 따로 논 건 불 보듯 뻔했다. 육군, 해군에서 각각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 대부분의 고위직을 독점하였다.[* 예외적으로 [[러일전쟁]] 당시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사쓰마 출신이었다.] 심지어 황태자비 선정에서도 육군(조슈)과 해군(사쓰마)이 대립하기도 했다. 육군(조슈)은 [[화족]]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 최종적으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장남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 왕에게 시집간다.]를, 해군(사쓰마)은 방계 황족이자 사쓰마 번주의 외손녀[* [[고준 황후]](나가코)의 어머니 시마즈 치카코(島津俔子)는, [[사쓰마 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8녀이다.]인 [[고준 황후|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 1947년 이전의 [[일본 황실]]에서는, [[천황|덴노]]의 4대손녀까지를 내친왕이라 하고 5대손녀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1947년 [[황실전범]]이 개정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만을 황족으로 인정하게 됨에 따라 덴노의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남자는 친왕/왕.]을 지지했다. 결국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정해져 [[쇼와 덴노|히로히토]] 황태자와 결혼했지만, 그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일명 '궁중모중대사건'이라 불리며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육군은 해군의 제안에 반대한다"에서 단어를 몇개 바꿔서 "[[조슈]] 번은 [[사쓰마]] 번의 제안에 반대한다"고 말하거나,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를 약간 바꾸어서 "일본에는 사쓰마와 조슈라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전까지 남아 있던 상식적인 위화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사고들이 있었음에도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것 이외엔 큰 변화는 없었기에 사쓰마(=해군)과 조슈(=육군) 사이에 아래의 웃을 수 없는 부조리극이 펼쳐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해군의 경우 구 막부해군의 규모가 상당했던 탓인지 사쓰마 이외의 좌막파 집안 출신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상당했다. 센다이 번의 번사집안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대표적.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조슈벌이 주도를 하다 20년대 들어 비 조슈파벌의 성장과 우가키 군축을 거치며 조슈벌이 몰락하면서 지역주의에서 탈피한다. 정리하자면 육해군 대립의 큰 역사적 기원 자체는 무진전쟁과 유신 이전부터 내려온 조슈, 사쓰마 번간 갈등이 맞긴 한데 1870년대부터 30-40년대까지 거진 70년 긴 세월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고, 2차대전 시점쯤 돼서는 내부적으로 변화도 꽤 있었다.[* 애초에 그 악명높은 [[도조 히데키#s-3.2]]도 청년장교 시절엔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 시절부터 조슈 출신 군부 주류와 악쓰고 싸우며 한직을 전전하던 신세였다. 정치군인으로 성장한것도 당시 육군 내 당연히 자기뿐만 아니었던 조슈번 독점에 한이 서렸던 장교들을 규합하면서였다.] 그런데 그 변화가 이런 번별갈등을 아예 해소하고 능력주의적 관료제로 인사배치를 하는 통합된 국민국가로 긍정적인 체질개혁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파벌구조를 바꾼다고 더 많은 소규모 파벌들을 가져와 차라리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쓰마가 다 해처먹던 시절보다 더더욱 암적으로 전락했다.''' 나라 전체가 천황의 신적인 카리스마 아래 일치단결된 만세일계의 일본은 서민들한테나 떠먹이는 환상이고, 실질적으론 정부와 군부 각 부서마다 전부 봉건 왕국마냥 군림하며 1890-1910년대엔 차라리 번간 양자대립이었던 분열구조를 대본영, 연합함대, 육군성, 해군성, 관동군 이런식으로 더 악성으로 잘개 쪼개져버린 것이다. 가장 큰 규모에서부터 이럴진대, 아래까지 내려가면 온갖 파벌이 얽히고 섥혀서 같은 집단군, 사단, 연대, 대대, 중대에서도 눈앞의 미군을 상대하기 전에 자기 반대파부터 상대하는 분열의 끝을 달린 것이 일본군의 실상이었다. 만약 쇼와 시대 초기 일본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해당 대체역사에서는 일본군의 여러 파벌들 중 한 파벌이 다른 파벌을 상대로 내전을 일으켜 일본이 제2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미국이 의도치 않게나마 일본을 통일했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